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문단 편집) ===== 젤라 전투 ===== 젤라 인근에서 이탈리아 해안 방어 부대의 저항이 일소된 후 이 해안에 미 제1보병사단[* 빅 레드 원으로 유명한 사단 맞다.]과 제45보병사단이 상륙한다. 이에 독일군은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주변에 주둔하던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제4산악보병사단을 동원하여 젤라를 향해 반격을 시도했다. 당시 미 7군은 2~4마일 정도의 깊이밖에 교두보를 형성하지 못했고, 더욱이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도 있었고 해안이 가득차 탱크와 같은 중장비를 하역하려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시도도 실패했기 때문에 티거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젤라에 상륙해있던 미 1사단과 45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1사단과 45사단은 포병과 해군의 함포사격 등 화력지원 이외에 기갑 전력의 지원은 전혀 받지 못했고, [[취사병]], [[행정병]], 해군의 연안 요원까지 전부 전투에 투입될 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고 한다.] 그 순간 '''뒤에서 포탄이 날아와 티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Shubrick_(DD-639)_0563902.jpg|width=1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Boise_(CL-47)_underway_1938.jpg|width=100%]]|| || [[글리브스급 구축함]] 슈브릭(Shubrick) ||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시(Boise) || 위의 사진의 주인공인 슈브릭과 보이시가 이들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해오고 있던 것이였다. 여기서 2차대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전차와 군함 간의 포격전'''이다. 티거가 해안의 군함을 향해 포탄을 발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삽질에 불과해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당연한 것인데, [[티거]]의 88mm 주포는 육상에서야 공포의 전차포였지만 [[해군]]에게는 함대의 가장 작은 군함인 [[구축함]]의 주포만도 못한 포였다. 당장 우습게 보이는 구축함조차 주포는 5인치가 많았는데 5인치면 '''127mm'''이고, 이런 포조차 안 먹히는 경우가 많은 군함들에게 88mm는 애교다.] 두 전투함은 전차와의 포격전에서 전차를 여러 대 파괴하고,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포격으로 인해 추축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독일의 504중전차대대는 17대의 [[티거]] 중 14대를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인해 손실한다. 이런 뼈아픈 손실에도 불구하고 추축군은 젤라 교두보를 향해 3방향으로 반격을 가했다. 전투함의 포격 지원에도 불구하고 젤라 교두보에서 가장 취약했던 남동쪽 부근에서 독일군 전차가 교두보에 진입하는 등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나 미군은 이를 겨우 막아낸다. 이 전투에서 젤라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하루동안 전투에서 미 육군은 2,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옥도라 불리는 [[이오지마 전투]]의 첫날 상륙전에서 미 해병대 2,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젤라 전투의 사상자와 비슷한 숫자 젤라 전투의 사상자가 시칠리아 전역에서 연합군이 입은 가장 큰 피해다.] 그 이후 미군의 피해를 보충하기 위해 패튼은 젤라 인근에 제82공수사단을 추가로 야간에 공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2차 공수작전이 지상의 대공포 부대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된 것이다. 당시 82 공수사단장이었던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1차 공수작전 [* 1차 공수작전 편제 : 제505공수보병연대, 제504공수보병연대 3대대, 제456공수야전포병대대, 제80공수대공대대 D 포대, 제307공수공병대대 B중대] 이후 해안에 상륙하여 2차 공수작전을 지켜보기로 하였는데, 내친김에 인근 대공포 기지 몇군데를 불시 점검해보았더니 2차 공수작전(허스키 II)[* 2차 공수작전 편제 : 제504공수보병연대(3대대 제외), 제376공수야전포병대대, 제307공수공병대대 C중대]이 있다는 것을 대공포 부대원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겁한 리지웨이는 급히 인근 부대에 2차 공수작전이 있다는 사실을 전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더군다나 공교롭게도 공수작전 직전에 소수의 독일 공군기들이 경미한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안그래도 대공포 병력들이 긴장해있는데 튀니지에서 이륙한 82공수사단 504공수보병연대를 태운 C-47 대편대가 해안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한 대공포좌가 발포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대공포좌들도 따라서 죄다 발포, 이를 지켜본 해안의 미 구축함들도 상공에 보이는 수송기 편대에 일제사격. 결국 C-47 수송기 23대 격추에 37대가 손상 되었고 제82공수사단 504연대 정예 공수병들이 400명 넘게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82공수사단 부사단장인 찰스 키런스 주니어 준장은 이 비행기에 탑승 했는데 육해군 대공포 부대의 오인 사격으로 인해 바다로 추락해 실종 되었으나 익사 하는걸 보니 사망 한 걸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2개월반 동안 부사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1943년 10월 제임스 가빈이 부사단장으로 임명 되었다.]이 오인사격 참사를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빡칠대로 빡쳐서 현장 지휘관 패튼에게 반드시 책임자를 파악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패튼은 이날의 일기에 "내가 확실한 책임자를 잡아 처벌을 하지 않으면 아이크는 아마도 나까지 용서하지 않으려는 듯 하다"고 적었다.[* 이 사건은 패튼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이는 [[조지 S. 패튼#s-5|항목 참조]]. 이 아군 오사는 [[메달 오브 아너: 에어본]]에서도 묘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